유포니엄 극장판 '리즈와 파랑새' 관람 후기
스포일러가 상당수 포함되어있습니다.
<리즈와 파랑새>가 국내 정식개봉이 결정되어 극장에서 관람하고 왔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극장에서 직접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배급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극장판 <리즈와 파랑새>는 유포니엄 2기에 나왔던 카사키 노조미(플루트)와 요로이즈카 미조레(오보에). 이 두 사람의 서브플롯을 애니에서 극장판으로 옮겨온 이야기입니다. 저는 두 사람의 관계성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분께는 꼭 유포니엄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봐주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원작소설은 안 봤지만 아마 애니와 원작의 캐릭터들은 연출과 의도가 조금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노조미와 미조레에 대한 이야기에만 집중하려고 해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매우 돋보이기 때문에 행동 하나,대사 하나, 분위기 하나에 모두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어요. 특히 미조레의 노조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물결치면서 시선이 옮겨가는 장면들은 하나하나 숨이 턱턱 막히게 합니다. 영화 <캐롤>에서 나왔던 주연 두 사람의 눈빛 교환이 떠올랐어요…. 노조미를 향하는 미조레의 시선은 노골적일 정도입니다. 미조레에게 있어서 노조미는 자신의 전부니까요. 하지만 노조미의 시선은 좀 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찰나의 순간에 노조미가 미조레를 보는 시선에는 연민, 질투,사랑이 복합적으로 엉켜서 스쳐 지나가니까요.서로 눈이 마주쳤으면서도 노조미쪽에서 일부러 시선을 돌려 무시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미조레가 눈치채지 못하는 타이밍에 노조미가 미조레를 보는 시선을 의식하면 오히려 미조레보다 관음적이면서 농밀한 것 같아요. 은밀하니까요.말수는 거의 없지만 직접적으로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미조레와 달리 화제전환이 휙휙 돌아가며 결국엔 자신의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 않고 숨기려고 하면서 적당히 타인에게 맞장구쳐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호감을 사면서 둘러싸일 수 있는 자신의 포지션을 철저히 지키는 노조미라면요.
인간관계를 얕고 널리 넓혀가는 사람인 노조미와 낯섦을 극복하기엔 시간이 걸려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며 다른 사람들이 속마음까지 터놓게 만드는 미조레까지.노조미와 미조레는 너무도 상극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칸자키 리리카(미조레와 같은 더블 리드 파트 후배)가 미조레 앞에서 돌연 울음을 터트린 것도. 미조레에겐 서툴고 느리지만 다른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아닐까요. 겉껍질과 속이 거의 차이 나지 않는 사람과 표면의 페르소나가 너무 강해 오히려 겉핥기식으론 친한 것 같지만 속내를 좀체 들여다볼 수 없는 그런 사람.갑자기 리리카가 노조미에게 건네주고 간 삶은 달걀이 생각나네요.왜 하필 삶은 달걀이지? 싶었는데 모두 의미 부여를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저는 TV 애니 판에서만 봤던 노조미와 미조레 관계가 이렇게 입체적으로 그려져서 너무 좋아요.
그런 노조미의 속내가 드러난 노조미와 미조레의 포옹 장면은 정말·갈등이 최고조가 되는 부분인데….
미조레가 니이야마 선생님에게 음대 지원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노조미도 음대 지망을 해보겠다고 한 일. 백지상태의 진로희망서를 낸 건 미조레 뿐만이 아닌 노조미도 마찬가지인데 굳이 미조레에게만 음대 지원 권유를 한 일. 뒤쳐지고 싶지 않아서 자신도 음대 지원을 한다면 노조미도 분명 따라올 거라는 걸 알고 있던 노조미·모든 걸 알고 있는 노조미. 미조레의 마음까지도. 그래서 포옹을 할 때도. 미조레의 고백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놀란 건 항상 앞서 걷던 노조미를 뒤쫓던 미조레의 오보에 연주 재능에 눈물이 나오고 마는 거죠. 미조레가 미조레에겐 노조미가 전부라며 열렬히 고백해 오는데 미조레의 플루트가 좋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노조미는 이때 속에서 울렁울렁하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특별한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조금 더 욕심내서 음대 지원을 했던 생각도 정리하고 "미조레의 오보에 소리가 좋아."라고 합니다. 미조레에게는 재능이 있고 지금보다 넓은 세계를 볼 기회가 있고, 미조레가 오보에를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친구로서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리즈와 파랑새>는 노조미와 미조레의 얘기를 극장판 속의 동화 '리즈와 파랑새'의 이야기와 매치시키면서 이야기가 풀어져 갑니다 노조미가 파랑새, 미조레가 리즈인 줄 알았습니다. 1학년 때 미조레를 먼저 관현악부에 들어가자고 권유해놓고는 미조레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만둔 건 노조미였거든요. 그때의 갑작스러운 이별의 아픔이 미조레에게는..노조미의 플루트 소리만 들어도 토기가 올라올 만큼의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한 번 예고도 없는 이별의 아픔을 겪고 난 미조레에게는 언제든지 자신에게는 상의도 없이 새처럼 훨훨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게 노조미였습니다. 하지만 노조미는 결국 관현악부에 돌아왔어요. 주변사람들에게는 변덕스럽게 보이겠지요. 이제와서 다시 플루트를 하고 싶어서 멋대로 그만뒀다가 멋대로 들어오는 건 민폐라고. 아스카도 미조레와 노조미의 그런 관계성 때문에 노조미의 재입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과연 노조미가 플루트가 너무 좋아서 다시 돌아오기만 했을까요. 미조레는 미조레대로 자신마저 오보에를 그만둬버리면 그땐 정말 노조미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까 봐 계속 불었다고 합니다. <리즈와 파랑새>를 보기 전까지는 그저 노조미같이 자유분방한 성격의 캐릭터의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미조레가 심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너무나 큰 기이한 관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저는 <리즈와 파랑새>가 노조미와 미조레 두 사람 성장의 싹이 튼 이야기라고는 하고 싶습니다. 오보에를 그 자리에서 계속 놓고 있지 않던 미조레.그리고 다시 나타난 노조미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의 관계입니다. 먼저 미조레를 관현악부에 들어오게 했던 노조미는 미조레에게 약간의 죄책감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신이 돌아와서 미조레와 다시 사이가 좋아져서 같이 부 활동을 한다면 미조레를 해방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지도 모르지요.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미조레와 사이가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노조미에게 어떻게 하면 미조레 선배와 친해질 수 있는지 어드바이스까지 물어오는 마당에 자연스럽게 자만심도 들겠지요.자만심을 갖고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는 장면은 아가타 축제 건입니다.
나츠키와 부장이 된 유코가 일정을 정리하는 사이에 마을에서 축제가 열린다는 말을 하고 그 자리에서 그걸 들은 노조미는 미조레에게 '우리 축제에 갈까?'하고 권유합니다. 당연히 둘이서만 갈 줄 알고 그러자고 대답했지만 이내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가는 게 어떠냐며 화제를 돌리는 노조미에게 미조레는 약간의 실망이 비친 얼굴을 합니다. 나중에 미조레가 리리카와 사이가 좋아지고 노조미가 수영장에 같이 가자고 하니 이번엔 미조레가 다른 사람을 더 불러도 될까? 라고 물어봅니다. 미조레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니까 그런 제안을 할 줄은 예상도 못 한 노조미의 당황해하는 기색이 보입니다. 정말 자만에서만 끝나면 좋을 텐데 다른 부원들과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주변에 홀로 리드를 다듬고 있는 미조레가 보이는지 살핍니다. 그런 장면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노조미는 왜 굳이 자꾸만 미조레를 찾을까요. 그러면서 자신은 같은 파트 담당들과 패밀리 레스토랑에 갈 거라고 하며 미조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만끽하면서도 내심 혼자 내버려두고 무리속으로 사라져 혼자가 된 미조레를 바라보는 심리까지 나와요.저는 그래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도저히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리즈와 파랑새라는 동화책을 읽으면서 노조미는 마치 이 이야기가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 같다고 하고, 그런 노조미의 반응이 신경쓰여 도서관에서 한달 씩이나 연체를 하며 그 동화를 읽고 또 읽는 미조레는 아마 자신을 리즈에 이입하고 있었을 겁니다. 동화 속의 리즈는 매일 밤 자신이 잠든 사이 밤하늘을 날아다니려 창문 밖으로 나가는 파랑새의 존재를 눈치챕니다. 리즈를 외톨이로 놔둘 수 없다면서 날아온 이 파랑새가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하늘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리즈를 괴롭게 하지만 파랑새가 없으면 다시 외톨이가 될 현실 또한 괴롭고 괴로워서 리즈는 힘든 선택을 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파랑새를 위해서, 파랑새가 행복해지는 걸 바라서 이별을 택합니다. 이 리즈와 파랑새의 이별 부분을 담은 제3악장을 지금까지 '리즈로서 파랑새를 새장에 가두고 평생 곁에 있게 하고 싶어.'라며 생각하고 연주했던 미조레가 '파랑새를 위해서 리즈가 심장이 도려져 나갈 것만 같은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새장의 문을 열어줬던 이유.'를 떠올리고 누구보다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장면에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부원들도 미조레의 연주를 듣고 우는 장면이 나오던데 정말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더라고요.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것은 또 하나의 사랑의 형태니까요. 리즈가 파랑새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새장의 문을 열어젖히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다시 그 장면을 보면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요. 처음에 일요일에 미조레와 노조미가 제일 먼저 부실에 와서 연습하다가 리즈와 파랑새 동화책을 꺼내서 같이 읽던 장면. 노조미는 리즈와 파랑새의 이별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이왕이면 해피엔딩이 좋을 텐데.라고 합니다. 파랑새의 대사처럼요." 내가 리즈와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게 파랑새의 행복인데 왜 나더러 하늘로 날아가냐고 하는 것. 파랑새에게는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하늘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리즈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을 거예요. 이 시점에서는 노조미도 자신을 파랑새에 대입했던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하지만 포옹 이후에 두 사람의 인식은 바뀌었으니까요.파랑새가 미조레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아직 새장밖에서 나오지 않은 미조레에게 노조미가 음대가 아닌 일반대를 간다고 말한다면 미조레는 그만한 음악의 재능이 있음에도 음대를 포기할 거예요. 자신은 노조미의 곁에 있고 싶으니까.
하지만 리즈와 파랑새라는 동화가 있었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닮았기에. 미조레가 리즈의 마음을 '파랑새의 마음'에서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여전히 같이 만나 아침에 등교하지만. 한 명은 관현악부 부실로. 한 명은 도서관으로 흩어집니다. 서로 다른 길로 갈라졌지만 마지막엔 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며 같이 하교하는 모습이 나오면서 완전한 헤어짐은 아닌,병적인 집착과 과도한 의존성에서 탈피한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처음 영화 시작할 때 나왔던 Disjoint 라는 단어에서 Dis가 지워지고 joint 라는 단어가 되면서.오히려 다른 길을 확실하게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이 비로소 합쳐진 거예요.이 부분은 노조미와 미조레의 희망적인 미래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성장했어요. 확실히요.
<리즈와 파랑새>를 보기 전의 노조미와 미조레에 대한 캐릭터 인식이 완전히 뒤집히는 게 재밌네요. 저는 중반까지도 파랑새는 노조미고, 리즈는 미조레라고 생각했거든요. 섬세한 연출과 동화 같은 작화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 좋았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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